28주년 맞은 부마민주항쟁, 잊혀져가는 민주운동사 아쉽기만...
부마민주항쟁이 올해로 28주년을 맞았다. 한국 정치 현대사의 중요한 한 획을 그은 의미있는 반정부 시위로써 그 의미가 남다르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물론 부마항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부산대학교 현재 재학생들조차도 부마항쟁의 의미와 역사적 가치가 제대로 승계되어 지지않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다.
부마항쟁은 한마디로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 종말을 앞당긴 계기를 마련했고, 종교계는 물론, 학생들과 시민들이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범국민적 반정부 시위였다고 볼 수 있는데 그동안 본질적인 운동사가 학생들과 일부 노동자들이 참여한 시위로 왜곡되어 알려져 민주항쟁이 아닌 폭동으로 잘못 인식하고 상황을 보면서 사뭇 심심한 우려를 안겨주고 있는 듯 하다.
부마민주항쟁 모습
이어 8월 11일 YH사건, 9월 8일 김영삼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 10월 4일 김영삼의 의원직 박탈 등 일련의 사건이 연이어 발생함으로써 정부의 유신체제에 대한 야당과 국민의 불만이 크게 고조되었다. 1
그러한 가운데 10월 13일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이 사퇴서를 제출하였으나 공화당과 유정회 합동조정회의에서 '사퇴서 선별수리론'이 제기되어 부산 및 마산 출신 국회의원들과 그 지역의 민심을 크게 자극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 결과,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에서는 10월 15일 부산대학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되고, 16일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 시민들이 합세하여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전개되었으며 시위대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파출소·경찰서·도청·세무서·방송국 등을 파괴하였고, 18일과 19일에는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었다.
이에 정부는 18일 0시 부산 지역에 비상명령을 선포하고 1,058명을 연행,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으며, 20일 정오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하고 군을 출동시켜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게 된다.
비록 시위는 진정되었으나,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함으로써 유신체제의 종말을 앞당긴 계기가 되었다.당시는 술집에서 시국사건에 대한 이야기만 꺼집어내도 쥐도 새도 모르게 경찰에 붙잡혀 가던 시절이였고 거리를 나선 데모는 목숨을 걸어놓고 하는 행위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위험속에서 당당하게 앞장설 수 있었던 것은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극도에 다달아 분출된 결과이며, 인간존엄성 자체가 송두리째 파괴된 삶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역사의 대의속에서 이뤄진 민주운동사 '부마민주항쟁'인 까닭이다.
지난 16일 부마민주항쟁 당시의 구속자를 중심으로 한 군사재판기록이 담긴 자료집 7권이 전면 공개되고 당시 실제 시위에 참여했던 이들의 생생한 증언이 이어져 눈길을 끌고있다. 이번 재판기록 공개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조명함으로써 부마민주항쟁의 의미를 되새기고 잘못 알려진 운동사를 바로잡는 계기가 되어야 할것이다.
아울러, 4.19민주혁명의 정신을 계승하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된 만큼 과 같은 맥락에서 10.16일 '부마민주항쟁'은 한국 정치 현대사의 중요한 민주 운동사로 그 의미와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가슴깊이 새겨 나가야함을 오늘을 사는 우리 젊은 세대들은 잊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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