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시풍경과 간판
대부분의 사람들은 간판풍경을 통해서 도시를 인식한다. 가로의 모습이나 주요 건축물이 이미지로 남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그렇고 그런 차별성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 차별성이 없을까? 간판이다. 어디를 가더라도 볼 수 있는 동일한 간판 때문이다. 서울의 종로에 있는 간판이 부산의 광복동 거리에도 있고, 시골의 면소재지에도 있다.
무질서한 간판도 문제다. 간판을 단순히 호객행위의 수단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그러기 때문에 대부분의 간판은 눈에 잘 띌 수 있도록 크고, 자극적으로 설치한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그런 생각으로 만든 간판은 오히려 인지성을 떨어트리고 혐오감마저 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아파트단지 안에 있는 상가를 보자. 그 곳을 이용하는 주민의 대부분은 아파트주민이다. 간판이 없어도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다. 2층엔 중국집이 있고, 일층 모서리엔 문방구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원색적이고 자극적인 간판들로 도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쟁심과 불안감이 그 원인일 수 있다. 이웃 상가보다 더 돋보여야 장사가 잘 될 것이라는 맹신을 떨쳐버리기 전에는 해결될 수 없는 고질적인 문제이다. 도시의 가로는 이 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 않다.
간판이 도시풍경을 결정짓는 오늘날, 간판은 도시의 얼굴마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건축물일지라도 간판으로 점령당한 도시의 모습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겠는가.
다행스러운 것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그 해답을 찾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전략을 세우고 시간을 갖고 추진한다면 지금보다는 나은 도시모습을 창출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있다고 본다.
간판 세계에서는 간판을 ‘간판’이라하지 않고 ‘옥외광고물’이라고 한다. ‘간판쟁이’보다는 ‘옥외광고물제작자’라는 말이 더 품위가 있어 보이기 때문일까? ‘간판학과’보다는 ‘옥외광고물학과‘가 더 고상해 보이기 때문인가? 하여간 업그레이드는 하고 싶은데 현실은 마음 같지가 않다.
서울시 도시정비반장은 말 그대로 도시를 정비하는 실무책임자이다. 도시를 정비한다? 정비해야할 도시의 범위는 물론 서울이지만 정비대상이 너무 포괄적이어서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다. 서울의 얼굴(간판)을 다듬는 일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나는 간판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별로 없는 것이 아니라 아예 무지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간판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니 문제는 문제다. 도시정비반장에 발령받아 아직 3개월밖에 되지 않아서 뭐라 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현장에서 부딪치며 이해한 나름대로의 몇 가지 처방을 해 보고자 한다.
2) 위법과 적법의 경계선이 없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법
간판을 다루는 법률은 ‘옥외광고물등관리법’이다. 1962년에 제정되었으니 벌써 40년이 넘었다. ‘美觀風致와 美風良俗을 유지하고, 공중에 대한 위해방지와 건강하고 쾌적한 생활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이 법의 목적이다. 이는 헌법 제35조의 환경권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법 목적에 맞게끔 운영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대표적인 것이 법규정이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는 것이다. 마치 미적분을 풀어야 할 정도로 혼란스럽다. 왜 그렇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인·허가를 담당하는 실무자들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간판제작자는 물론이고 점포주들은 더욱 그렇다.
그러니 거리에 걸린 간판이 위법인지 아닌지 가릴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이는 잘못된 법이 분명하다. 몇몇 전문가들만을 위한 법은 법으로서 존재 이유가 없다. 법은 알고 쉬워야 한다. 누구나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위법인 줄 모르는데 어떻게 법을 지킬 수가 있는가. 대략 30% 정도가 위법이라고 한다. 그 보다 더 많을 수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간판의 종류만 모두 16가지다. 부착위치에 따라, 규모에 따라, 지역에 따라 설치 허가나 신고대상으로 구분되는 것이 그렇고, 이에 따른 표시방법과 금지지역 또는 완화지역 등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이러한 이유는 새로운 종류의 간판이 등장할 때마다 임기응변식으로 짜깁기를 해왔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광고물관리법을 잘 들여다보면 경제활동을 지원하는 차원에서 간판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간판은 경제활동의 부산물이다. 많은 사람들은 관대함을 가지고 있다. 그 관대함을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헌법의 환경권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시각공해의 수준이다. 도시경관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점을 감안한다면 도시적인 맥락에서 간판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최근 개정을 추진중인 ‘옥외광고물등관리법시행령’ 내용을 들여다보면 상업지역안에서의 5층까지 간판을 부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있는데, 이는 도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그야말로 간판을 경제활동의 한 수단으로 접근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닌가 한다.
3) 디자인이 실종된 현실 - 디자인 매뉴얼의 개발 보급
디자인이 없다. 한마디로 튀고 보자는 식의 간판이 대중을 이룬다. 왜 그럴까? 옥외광고물 제작시장을 들여다보면 그 이유는 명확하다. 경쟁에 의한 저렴한 단가, 디자인이 존재할 필요성이 없다. 누구나 제작할 수 있는 현실도 한 몫을 한다. 재료에도 문제가 있다. 파나플렉스의 실사출력이 유행되고부터는 동일한 디자인의 간판이 어디에서든지 볼 수 있게 되었다. 간판시장의 이러한 환경 때문에 제작자들의 디자인을 기대할 수 없다는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이러한 원인은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들이 간판제작에 참여하기를 꺼린다는 것이다. 고상한 디자인이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간판쟁이’라는 천한 직업으로 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전혀 달라진다. 도시를 가꾸는 도시 디자이너, 환경 디자이너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멋진 직업인가. 그렇다. 간판은 도시의 얼굴이라 했고, 그 얼굴을 아름답게 꾸미는 사람은 도시 디자이너가 맞다.
그리고 현재 간판디자인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시스템도 없고, 매뉴얼도 없다. 참고할만한 변변한 자료도 없다. 디자인 마인드가 없다면 베끼기라도 해야 할 텐데 그런 자료가 없기 때문에 악순환은 반복되는 것이다.
디자인 마인드가 없는 사람들에게 하루아침에 바꾸게 할 수는 없다. 짧은 시간의 교육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간판의 제작과 디자인을 분리하는 것도 현실성이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디자인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장기적인 교육을 통해서 실력은 배양시켜야 한다. 또한 디자인을 전공한 자들로 하여금 광고물 제작업에 종사하도록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도 강구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그 때까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매우 조심스럽게 검토할 일이지만 간판디자인 매뉴얼을 개발해서 보급하는 일이다. 업종별로 간판을 디자인하되, 글씨의 크기와 서체·재료와 색상 등의 조합을 통해 10~20가지 변환할 수 있도록 한다면 단조로움, 획일성에 대한 우려는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매뉴얼은 간판제작자들에 대한 좋은 교육자료가 될 수 있으리라 본다. 학회나 제작협회에서 주도적으로 추진해주면 좋겠지만 여의치 않다면 서울시가 이 일을 추진하고자 한다.
물론 여기에 대해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보다 나은 대안을 현시점에서 찾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양해해 주리라 믿는다.
4) 건축행정과 간판행정의 이원화 - 통합행정을 통한 효율성 제고
좋은 간판은 건축물을 돋보이게 하는 간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간판은 건축물의 이미지를 바꾸어 버린다. 이런 상황에선 우수한 건축가는 필요 없다. 건축물은 간판을 부착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뿐, 외관을 감안해서 간판을 설치하는 사례는 극히 예외적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행 관련법령에서 간판의 설치 위치나 규격을 정하고 있다. 이 기준은 최소한의 기준일 뿐 건축물마다 갖고 있는 미관을 고려하도록 되어 있지 않다.
간판관련부서는 간판만 보고, 건축물관련부서는 건축물만 보는 행정시스템상의 문제이다. 서로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간판은 행정자치부가, 건축물은 건설교통부가 관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상당부분 문제를 해소 할 수 있으리라 본다.
가령, 건축물의 입면을 계획할 때 미리 간판의 부착위치를 미리 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건축허가나 건축심의시에 건축물에 부착하는 간판의 크기와 위치를 정하도록하고, 시공할 때에도 나중에 간판부착에 필요한 전기등의 설비를 설치하도록 하고, 사용검사를 할 때 이를 간판관련부서에 통보하면, 간판관련 인·허가 부서에선 미리 계획된 곳 이외에는 부착할 수 없도록 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다. 행정부서간의 협조만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문제는 없다.
서울시는 건축심의 대상 건축물과 지구단위계획구역안의 모든 건축물에 대해서는 건축물 입면계획시 간판의 설치위치와 설치규모를 표시하도록 할 예정이다.
5) 간판 지구단위계획제도의 도입
국토의계획및이용에관한법률에 의한 제1종지구단위계획구역안에서는 간판의 규격이나 형태·색깔등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도록 되어 있고, 그 계획에 따라 간판을 설치해야 한다. 서울에만 모두 198개 구역 9.5㎢가 지정되어 있다. 대부분 상업지역·준주거지역과 주거지역중 중요한 곳이 지구단위계획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일부구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간판계획이 수립되어 있다. 하지만 이를 옥외광고물등관리법시행령 제12조 규정에 의한 특정구역으로 지정·고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획으로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행정기관 상호간에 긴밀한 협조체계가 이루어지지 않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앞으로 지구단위계획구역 모두를 특정구역으로 지정하여 관리할 것이다. 그리고 청계천을 비롯하여 뉴타운 사업등 서울시가 계획적으로 사업을 추진하는 모든 구역에 대해서도 특정구역으로 지정할 예정이다.
서울시는 종로를 세계적인 가로로 꾸미기 위해 ‘종로 upgrade 프로젝트’를 추진 중에 있다. 버스중앙차로제를 도입하고 보도폭원을 조정하면서 포장재료와 가로수, 가로등, 안내판, 벤취, 가판대, 볼라드 등 Street Furniture에 대한 Total design을 통해서 가로의 면모를 일신시킬 것이다. 비용 일부를 지원해서 건축물의 리모델링과 간판정비를 유도하고, 유능한 디자이너를 채용하여 간판정비사업을 추진할 것이다.
종로라는 역사적인 특수성과 가로별 특성, 도시적인 맥락, 입지별로 집중된 용도에 대한 특성을 감안하여 간판의 형태나 색상등을 달리 정하려고 한다. 그리고 가로형 간판은 점포당 1개로 제한(세로형 연립간판 허용)하고, 2층에는 판형 간판대신 입체간판만 설치할 수 있도록 하면서 서체와 글씨의 크기, 색채와 재료 등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을 설정하려고 한다. 이러한 기준이 항구적으로 지켜지도록 지구단위계획으로 수립해야 하고, 특정구역을 지정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6) 간판문화를 살리기 위한 몸부림
간판문화가 있는가? 한마디로 없다. 저급한 문화도 문화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면 문제투성인 간판문화를 어떻게 살려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지금 이대로는 안된다는 사회적인 합의는 이루어진 것 같다. 앞에서 지적한 여러 문제를 하나하나 고쳐나간다면 언젠가 바뀔 것이다. 그러나 ‘고쳐나간다면’이란 단서에서 ‘고칠 수 없는 함정’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언제 우리가 바라는 간판문화가 정착될 것인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세미나를 개최하고, 시민들을 상대로 홍보를 펼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언론사의 협조를 얻어 이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또한 실무공무원과 제작자들에 대한 교육과 워크샵을 수시로 열어서 이 일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자질도 함양시킬 것이다.
그리고 미래의 간판문화를 이끌 대학생들로 하여금 동기를 부여하는 일도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각 지자체마다 ‘아름다운 간판 창작 공모전’에 개최하도록 하여 관심을 갖도록 하는 일이다. 서울시에서는 금년 6월경 중앙일보와 함께 처음으로 창작공모전을 개최할 것이다. 하반기에는 그해 설치한 우수한 간판을 뽑아서 표창도하고,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할 것이다.
7) 사족
간판에 문화라는 이름을 붙일만한 정도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는 주로 규제와 단속을 통해 간판행정을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에서 지적한 현재의 간판시장의 환경과 여건을 근본적으로 개선하지 않고는 간판문화가 자리 잡을 수 없다. 밑바탕을 만드는 일은 상당히 인내심이 필요하다.
위에서 제시한 몇 가지 제도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것은 변화를 위한 첫 걸음이라고 본다. 그 다음은 각 분야 전문가들이 책임지고 해야 할 일이다. 그래야 바른 간판문화가 정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문제만 지적하지 말고 처방을 내 놓지 않는 사람들과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다. 합병증으로 죽음을 앞둔 환자를 두고 왈가왈부 할 시간이 어디 있는가. 완벽한 처방보다는 우선 생명을 살리는 수술이 더 급한 일이 아니던가. 그 다음에 완벽한 처방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의 간판문화가 바로 그 합병증에 걸려 죽음의 문턱에 선 형국이라고 주장한다면 나의 착각일까?
(2004. 4)
자료제공-윤혁경의 건축법 해설
http://www.archilaw.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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